혼인을 하러 찾아온 평강에게
눈먼 노모는 이리 말하였습니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못생겨서
귀한 사람과 짝이 되지 못합니다.
당신은 향기롭고, 손을 만지니
풀솜처럼 부드러운 손을 가져서,
필시 귀한 사람이 분명한데,
누가 당신을 속여서 이곳까지
오게 했는지 모르겠군요.
내 자식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평강은 포기하지 않고
온달을 기다렸다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온달은 화를 내며,
평강을 자신을 홀리러 온, 여우나 귀신
취급을 하며,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평강의 결혼 결심은
자신의 아버지였던, 평원왕의 반대는
물론, 온달 본인과 그의 노모에게 조차
동의를 얻지 못하였습니다만,
결국 온달의 마음을 얻어,
같이 살기 시작합니다.
평강공주는 지금 말로
거의 킹메이커와 같습니다.
덜 떨어진 남편을 내조하여
늠름한 무사로 만들어내서,
자신의 아버지인 평원왕의
사냥대회에 내 보내서
눈도장을 찍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족하지는 않았죠.
그때 마침 578년경 북주의
무제 왕이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이때 온달이 선봉에 서서
큰 공을 세웁니다.
" 여러 장군들은 보시오. 이 사람이 내 사위 라오."
왕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진정 평강공주 리스펙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고구려 평원왕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엄연한 신분 질서가
있었고, 마치 설화나 동화 같은 배경에
사실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삼국사기 [온달 열전] 편에 수록되어 있으며,
당시 평원왕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통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히고 있었던 시절이어서
자신과 이해관계가 맞아 들어갔기 때문에
온달이 그의 사위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아마 온달이 평민에서 장군으로
출세를 한 후에 평강공주와 만나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워낙 파격적인 일이어서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당시는 전쟁이 흔한 시절이었고,
고구려는 밀려오는 돌궐과의
싸움에 신경을 쓰느라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겼던 때였습니다.
온달은 그 땅을 되찾으려는
욕망이 매우 컸었고, 돌궐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새롭게 수나라가
고구려를 향해 야심을 내뿜던
시절이었습니다.
수가 고구려를 위협하기 전에
등 뒤에 있는 신라를 견제해둬야
후일이 편안할 터였기에,
온달은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하며 싸움터로 떠났습니다.
신라가 차지했던 아차성은
서울과 구리시 사이의 아차산성으로
추정되지만,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이란
견해도 있습니다.
아무튼 온달은 아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을 맞고
전사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온달의 관은
움직이지 않았고, 평강이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장군, 살고 죽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이제는 돌아갑시다."라고
말을 하자 관이 움직였답니다.
온달이 정말 바보였는지?
평강공주가 그를 장수로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성의 내조가 남자를 왕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건 확연한
사실인 듯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온달과 평강공주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초판 1쇄 2001.,
3쇄 2007., 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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