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명의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보면 우리나라의 핵개발이 이휘소 박사의 죽음으로 무산된듯하며 그 죽음이 교통사고가 아니라 음모로 인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여러 번 테스트하며 살펴보아도 가족 모두 목숨에 지장이 없음에도 이휘소 박사만 사망한 교통사고의 전말은 신의 장난 그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닌듯합니다. 그리고 박사가 살아있었다고 해도 우리나라에 핵무기가 있게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추론도 억측인듯합니다.
박정희 전대통령과의 관계
물리학자 이휘소는 박정희 정부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그의 이야기는 다양한 측면에서 흥미로운 사실과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한 이후, 이휘소는 외국 동료들을 대하면서 한국 정부의 독재체제에 대한 부끄러움을 품었습니다. 이휘소와 박정희의 관계는 박정희의 독재 정권과 이휘소의 과학적 업적 사이에서의 괴리를 보여줍니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여름학교를 주최하려는 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휘소의 귀국
1974년, 이휘소는 미국 국제개발청 차관의 역할로 한국에 일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휘소가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을 돕기 위한 원조 계획에 참여한 것으로, 그의 향토로의 귀국이 미국 측에서도 고려되었음을 나타냅니다. 1977년, 이휘소는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고, 이후 정부에서는 그에 대한 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훈장은 이휘소의 유족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의 비판적 입장을 고려하여 3등급인 동백장만 주어졌습니다.
사실과의 괴리
이휘소의 대표적인 제자인 강주상은 스승과의 관계를 통해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한 논의를 나누었습니다. 이휘소는 독재가 진행 중인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정희와의 관계가 소설가 김진명의 작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이용후 박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이야기에서, 이휘소는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중심인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실제 이휘소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으로,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혼동하는 요소로 이야기됩니다. 사실 박사의 전공은 핵개발과 거리가 있기도 했습니다.
법정논란
소설 내용에 반발한 이휘소의 유족은 출판금지 및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법원은 소설이 허위임을 인정하였으나, 판결은 기각하였습니다. 이로써 이휘소의 명예가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법정에서의 판결은 논란을 종결되었습니다. 제2비서실 비서관 김광모의 증언으로 핵무기 개발 음모론은 부인되었습니다. 김광모는 박정희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였음을 명백하게 밝혔으며, 이휘소가 핵무기 개발자였다는 주장은 허위임을 확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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